보험은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는 계약이어서, 계약 때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사고는 보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상법 제644조 본문이 이런 계약을 무효로 하는 이유다. 단서는 당사자 쌍방과 피보험자가 그 사실을 몰랐으면 무효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조문이 문제 되는 사건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다퉈진다. 계약 당시 “보험사고”가 정말 이미 일어나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알았는지다.
무엇이 보험사고인지는 약관의 지급사유로 정해진다. 진단명이 계약 전에 있었다고 곧바로 사고가 이미 생긴 것은 아니다. 금감원 분쟁조정 제2000-7호는 뇌성마비 진단 뒤 가입한 어린이 건강보험에서 가입 당시 기능 상태 기록과 의료자문을 근거로 이미 1급 장해 상태였다고 보아 상법 제644조로 무효라고 했다. 반면 제2001-42호는 가입 당일 진단이 “의증”이었던 사안에서, 확정 진단과 1급 장해 진단이 모두 계약 뒤라며 지급하라고 했다. 제2017-16호는 14년 전 앓은 고환암과 같은 암이 보험기간 중 다시 진단된 단체보험 사안에서, 약관에 재발 면책 조항이 없고 과거 진단은 일회적 사건일 뿐 우연성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며 암진단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이 조문은 고지의무와 다르다. 고지의무 위반은 보험회사가 정해진 기간 안에 해지해야 효과가 생기고(상법 제651조), 위반 사실과 사고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음이 증명되면 보험금을 지급한다(제655조 단서). 제644조는 처음부터 계약이 무효가 되는 문제다. 제2017-16호도 과거 병력을 고지의무 문제와 보험사고 기발생 문제로 나눠 판단했다. 배상책임보험에서는 대법원 98다54397 이 결함 원지로 만든 봉지가 계약 뒤에야 찢어지기 시작했고 계약 당시 사고가 이미 발생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무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